“나는 항상 왜냐고 묻는 아이였어요.” 이건용 작가는 미술 바깥에서 미술을 사유하며 집요하게 미술의 본질을 물어왔다.
BAZAAR 안동선
2022.03.06
작업실에서 〈Bodyscape 76-2-2021〉 앞에 선 이건용 작가.
거대한 아파트형 공장 빌딩에서 이건용 작가의 작업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주차장과 면해 있는 커다랗고 새파란 문이 표식이다. “아내가 파란색을 무척이나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이건용 작가도, 아내도 파란색 옷을 입고 있다. 구획되어 있지 않은 너른 작업실의 사면에는 한창 진행 중인 작품들이 줄지어 벽에 기대어 있다. 1976년 시작해 76으로 번호를 매긴 〈신체드로잉(Bodyscape)〉 연작이다. 화면 뒤에서 붓을 든 팔을 넘겨 닿는 데까지 선을 그리는 〈76-1〉, 화면을 등지고 팔을 머리 위로, 다리 좌우로 뻗어 그리는 〈76-2〉, 화면을 옆에 두고 왼손 오른손 차례로 반원씩 그리는 〈76-3〉 등 총 9가지의 시리즈 중 서넛이 눈에 띈다. 이건용의 독창적 미학과 철학의 정수가 담긴 이 시리즈는 ‘하트 그림’ ‘날개 그림’ 등으로 불리며 아트 마켓에서 이건용 작가의 인기를 대변한다. 그리고 올 봄 베타 버전이 공개될 디지털아트 NFT 플랫폼 ‘에트나 ETNAH’에서는 디지털아트로 재탄생한다.
Installation view of Lee Kun-Yong, Pace Gallery, Hong Kong, 2022 Gallery.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외 미술계에서 이건용 작가의 위상은 고공행진을 했다. 지난해 가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개인전 «Bodyscape»에서 전시작이 완판됐다는 소식이 들렸고 해가 바뀌자마자 세계 미술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갤러리 중 하나인 페이스에서 이건용 작가와 글로벌 전속계약을 발표했다. 1월부터 3월까지 페이스홍콩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신체 드로잉〉 시리즈를 비롯해 1970년대 중반 〈이벤트-로지컬〉이라고 명명하며 발표한 일련의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소개했다. 그리고 2023년에는 뉴욕 구겐하임에서 열리는 〈아방가르드: 1960-70년대 한국의 실험미술〉에서도 이건용의 주요 작품이 소개될 예정이다. 그 모든 걸 기념하여 카메라 앞에 선 ‘한국 실험 미술의 거장’은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농담으로 사진가를 독려했다. “찍다 보면 점점 좋아질 거예요. 왜냐면 내가 행위예술가거든.”
〈Bodyscape 76-1-2021〉, 2021, Acrylic on canvas, 172x152x4cm.
1976년부터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는 〈신체드로잉(Bodyscape)〉 연작은 세계 미술사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어떻게 이런 회화를 시작하게 되셨나요?
1973년 파리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나무를 뿌리와 지층째 전시장에 옮겨 작품으로 제시하는 〈신체항〉을 선보였는데, 비행기표 살 돈이 없어 홀트양자회에서 유럽으로 입양된 아이 둘을 데려다주는 조건으로 정말 힘들게 파리에 갔어요. 그때의 감각이 선명해요. ‘내 몸이 파리에 왔다’라는 감각! 그 감각을 통해 작가의 신체가 예술의 직접적인 미디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이런 아이디어는 곧 미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과 만났지요.
그 물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나요?
저에게 회화는 테크닉이나 그런 게 아니라 현상, 사건의 형태 같은 거에요. 중학교에 올라가서 미술 교과서를 받았는데 거기에 인상파, 큐비즘, 야수파, 추상화 같은 작품들이 죽 실려 있는 거예요. 그때 생각했죠. ‘내 이럴 줄 알았어.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리고 있었어!’ 당시 저는 집에서 새벽 5~6시에 나와서 출근길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도시 풍경을 그리고 등교했어요. 덕수궁에서 사생대회를 하면 고리타분하게 궁궐에서 자연 풍경을 똑같이 묘사하는 걸로 등수를 매기다니 우습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신체드로잉〉은 제 키, 양팔과 다리 길이 등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범위까지 선을 그으며 신체가 평면을 지각해나가는 과정을 화면에 드러내는 거예요. 캔버스에 자연을 묘사하거나 감정을 쏟아내는 게 아니라 어떤 필연적인 논리에 의해서 서술되는 현상을 기록하는 것이죠.
어떻게 중학교 시절부터 회화의 본질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나요?
어릴 적 온 집 안에 책이 굴러다녔어요. 목사였던 아버님의 높다랗게 쌓인 인문학 책 무덤 속에서 자란 환경, 환자들이 일부러 찾을 정도로 아프지 않게 주사를 잘 놓던 손재주 많은 어머님의 특성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미국의 개념미술가 조셉 코수스가 〈철학 이후의 미술(Art After Philosophy)〉(1969)을 쓴 게 20대 초반인데, 사람들이 그걸 보고 대단하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부터 갖고 있던 의문에 대해 혼자만의 연구를 해왔던 터라 그 나이에 나만의 개념이 확고하게 잡혀 있었죠.
〈달팽이 걸음〉을 시연 중인 이건용 작가.
이미 완성 단계였던 개념과 수많은 아이디어가 1970년대 중반 파리에 다녀온 후 수십 개에 달하는 퍼포먼스 작품으로 터져 나왔어요. ‘ST(Space and Time)’ 미술학회, ‘AG(아방가르드)’ 그룹 활동을 통해 〈동일면적〉(1975)과 〈실내측정〉(1975)을 시작으로 일련의 퍼포먼스를 선보이셨는데요, 이들을 〈이벤트-로지컬(event-logical)〉이라는 이름으로 명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건(이벤트)과 논리(로직)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요. 사건이라는 게 논리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또 논리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건 사건이 아닐 테니까요. 하지만 예술에서라면 가능하죠. 저는 예술 안에 로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고등학교 시절 우리 학교에는 특이하게도 논리학 수업이 있었는데 그때 독일에서 공부하고 온 젊은 선생이 살짝 언급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아주 짧은 문장으로 이뤄진 명제들에 일련의 번호를 매겨서 전개했는데 그것부터가 신선했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는데, 말할 수 없는 것이 뭐냐면 논리적으로 문장을 이룰 수 없는 것이에요. 비트겐슈타인을 접하고부터 어딘가에서 철학이나 언어학 심포지엄이 열리면 ‘빵덕모자’로 짧은 머리를 가리고 아버지 옷을 입은 채 참석했어요. 제가 벌인 일련의 퍼포먼스는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해프닝이 아니고 그 작업들을 준비하면서 노트 한 권을 쓸 만큼 치밀한 분석이 바탕이 된 것이에요. 그것을 통해 이건용이라는 사람의 ‘신체’와 퍼포먼스가 일어나는 ‘장소’, 그리고 관람자들과의 ‘관계’를 탐구했죠.
〈Bodyscape 76-1-variation-2021〉, 2021, Acrylic on canvas, 181.8x227.3cm.
수많은 이벤트 가운데 〈달팽이 걸음〉을 대표적인 퍼포먼스로 꼽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첫째 그 행위는 복잡하고 장황하지 않고 단순해요. 백묵을 손에 든 채 쭈그리고 앉아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면서 바닥에 좌우로 선을 그어요. 느린 속도로 나아갈 때 선이 탄생하는 동시에 발바닥이 바닥과 만나 그 선을 지우게 됩니다. 그리는 것과 지우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죠. 19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프레스 오프닝 때 〈달팽이 걸음〉을 두 번째로 선보였는데, 동양에서 온 웬 비쩍 마르고 안경 쓴 남자가 구석에서 낙서를 하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어요. 다른 쪽에선 요셉 보이스가 퍼포먼스를 한다고 소란스럽기도 했고요. 한 5미터쯤 나아갔을까. 전 세계에서 온 기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반대편 벽에 다다라 천천히 일어나 끝을 알리니 어떤 이들은 다가와서 저를 끌어안으며 감동을 표했죠.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는 달팽이 몸에서 나온 진액이 흔적을 남겨요. 선을 그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지우는 행위를 결합시키는 〈달팽이 흔적〉은 회화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렸다 지웠다 하면서 그림을 완성하거든요. 저는 회화의 본질을 회화 바깥에서 사유하고 싶었어요.
작업 중인 〈Bodyscape 76-3-2021〉.
예술을 예술 바깥에서 사유하고 싶었다고 하니 또 다른 대표작 〈장소의 논리〉(1975)가 떠올라요. 바닥에 원을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 중심을 가리키며 “거기”라고 외친 후 그 안으로 들어가 발밑을 가리키며 “여기”라고 외치는 그 퍼포먼스요.
그 작품을 그렇게 해석해도 되죠. 한번은 어떤 사람이 저를 찾아와서 “하트 좀 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과거 수련 기간 동안은 어떤 형상을 열심히 묘사하기도 하고 지금도 가끔 꽃이며 누드며 구상회화를 그리지만 본격적인 내 작업에는 그런 그림이 없다고 하자 모르는 척 말라는 거예요. 도록에서 짚어보라 했더니 〈76-3〉을 가리키며 이게 하트 아니고 뭐냐고 성질 내더군요.(웃음) 제가 그 그림을 그린 지 20년 만에 하트라는 형상이 발견된 거죠. 하트 그림, 날개 그림이 잘 팔린다고 하는데 그 작품에서 어떤 걸 보고 느끼든 그건 오롯이 관람자의 몫이에요.
〈신체드로잉〉의 회화사적 전복성을 당시 군부 독재 체제 메커니즘의 전복으로도 확장해 보는 시선들이 있더라고요.
원체 어른들한테 “그건 왜 그래요?” 맹랑하게 따져 묻던 아이가 군부 독재 시절에 작가로 살았으니 아무래도 모든 작품에 전복적이고 역설적인 의미를 담게 되지 않았겠어요? 커다란 전지를 전시장에 가져와서 백묵으로 그 크기를 표시해놓고 한편으론 잘게 찢어 구경하는 사람들 구두 위를 비롯해 전시장 곳곳에 흩뿌리는 〈동일면적〉을 할 때도 멀리서 보기에는 무섭지만 사실 한 줌밖에 안 되는 권력의 속성에 대해 살짝 비꼬는 측면이 있었어요. 〈손의 논리〉(1975)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것들이 하나둘 쌓여 찍혔죠. 〈신체항〉 작업할 때는 흙더미 속에 폭탄이 있을지도 모르니 파헤쳐 봐야 한다고도 하고요. 그런 시절이었죠.
〈Bodyscape 76-2-2021〉, 2021, Acrylic on canvas, 162.2x130x4cm.
새해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스갤러리와 글로벌 전속계약이 발표됐고, 현재 페이스홍콩에서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이건용 현상’의 조짐은 몇 년 전부터 꾸준했습니다. 소감을 여쭙고 싶어요.
제가 이우환 선생 다음으로 페이스와 계약을 맺은 한국 작가일 겁니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지만 제 표현대로 하면 ‘여덟 살’이 되었고 신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일을 가지고 어깨를 으쓱하는 것도 웃겨요. 다만 그런 자부심이 있어요. 제가 한국 작가이기 때문에 세상에 뒤늦게 알려지게 되었지 이미 1970년대부터 제가 하는 작품은 세계적인 수준이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대한 물음들을 집요하게 좇는 인생을 살면서 한 번도 나 자신을 의심해본 적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