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 이은주 기자
서울 리안갤러리 '백남준' 전시
판화 '진화, 혁명, 결의' 볼 기회
비디오 설치 '볼타'도 눈길 끌어
백남준, '진화 혁명 결의', 1989, lithography, etching, 0.2 x 52.4 cm.[사진 리안갤러리]
백남준, '진화 혁명 결의', 1989, lithography, etching, 0.2 x 52.4 cm[사진 리안갤러리]
작품 앞에 한참을 서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닮은 듯 각기 디테일이 다른 8점의 판화 작품. 언뜻 보면 로봇 이미지만 도드라져 보이지만 잠시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보면 배경에 마치 유기체의 실핏줄처럼 가느다란 선으로 세밀하게 그려진 디테일이 보인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이 1989년 작 판화 ‘진화, 혁명, 결의’(Evolution, Revolution, Resolution). 30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참신하다.
서울 통의동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백남준(1932~2006) 전시가 최근 개막했다. 백남준의 유명한 로봇 작품 '볼타(Volta)' 등 비디오 설치 작품부터, 회화 작품 15점과 사진 작품을 함께 소개하는 자리다. 총 27점 중 판화가 10점, 회화는 6점이다. 백남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전시다.
백남준, '진화 혁명 결의', 1989, lithography, etching, 0.2 x 52.4 cm사. [진 리안갤러리]
먼저 판화 작품 ‘진화, 혁명, 결의’(Evolution, Revolution, Resolution)로 돌아가보자. 이 작품은 구형TV와 라디오 케이블로 제작했던 3m짜리 비디오 조각 연작 ‘혁명가 가족 로봇’을 에칭 기법으로 변주한 것이다. ‘혁명가 가족 로봇’은 프랑스 정부로부터 의뢰받아 제작한 혁명 200주년 기념 작품으로 각 로봇에는 마라(Marat), 로베스피에르(Robestpierre), 당통(Danton), 디드로(Diderot)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프랑스 혁명에 연관돼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인물들이다. 백남준은 그 이름에 관련된 ‘암살’ ‘혁명은 폭력을 정당화하느냐’ ‘웅변’등의 문구를 낙서하듯이 적어놓았다. 역사에서 영감을 받아 자유분방하게, 미래적으로 풀어낸 백남준의 감각이 경이롭다.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올림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판화 ‘올림픽 센테니얼(Olympic Centennial)'(1992)도 있다. 비디오 아트에서 영향받은 모티프들과 마치 낙서처럼 국문, 영문, 한자로 쓰인 글자로 이뤄진 작품이다.
백남준, Untitled_1990, Acrylic, crayon on canvas,45 x 56 cm.[사진 리안갤러리]
백남준,Untitled, 1994_Oil on canvas, 45.5 x 38 cm.[사진 리안갤러리]
이번 전시에선 회화 작품도 볼 수 있다.그가 한국적 색감인 오방색과 색동 문양을 얼마나 즐겨 사용했는지 엿볼 수 있다. 1990년 회화 '무제' 화면엔 미니 TV 모니터가 수없이 반복돼 있고, 그는 각 TV의 화면 안에 알록달록한 점을 찍었다. 이 역시 그의 설치 작품을 재치있게 평면으로 풀어낸 작품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이렇게 그림을 완성하고 액자 오른쪽 상단에 안테나를 다는 센스를 잊지 않았다.
1994년 작 '무제'(1994)에는 오방색 배경 위에 마치 화면이 사람 얼굴처럼 눈, 코, 입을 갖고 있는 텔레비전 형상을 그렸다. 1992년 석판화 '올림픽 100주년'은 마치 백남준의 머릿 속에 축적돼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모두 한 자리에 펼쳐놓은 듯 다양한 문양이 빼곡히 그려져 있다.
백남준, 볼타, 1992, 195.5 x 104 x 61 cm.[사진 리안갤러리]
비디오 조각 '볼타(Volta)'(1992)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볼타'는 3대의 소형 모니터로 이목구비를 만들고, 몸체에 해당하는 구형 TV 케이스 안에 네온으로 볼트(V)의 형상을 만들어 넣은 로봇 모양 작품. '볼타'라는 작품 제목은 연속 전류를 공급해줄 수 있는 전지를 최초로 개발한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알레산드로 볼타의 이름에서 땄다. 이 작품은 본격적인 전자 시대로의 도입을 암시했던 백남준의 예지적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DMZ 2000 공연에서 선보인 첼로와 월금 형태의 대형 비디오 조각을 변주한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2000)의 영상도 시선을 오래 붙잡는다.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일본과 독일에서 미학, 미술사, 음악사를 전공했다. 그 뒤 유럽, 미국을 떠돌며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Fluxus) 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비디오 영상을 결합하고,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개발했다.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을 통해 세계 미술계 주목을 받았으며, 1984년에는 파리와 뉴욕, 베를린, 서울을 연결하는 최초의 위성중계 퍼포먼스 작품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선보였다.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회고전을 열었고,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대규모의 회고전을 열었다.
홍세림 리안갤러리 큐레이터는 "백남준은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실험적인 작업을 통해 현시대 그 어떤 예술가보다도 미래를 명확하게 예견하고 작품으로 표현한 작가였다"며 "이번 전시에서 작가의 폭넓은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안혜령 리안갤러리 대표는 "백남준은 남긴 업적에 비해 국내에서 아직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안 대표는 "백남준 작품의 가격은 동시대에 활동한 대표 작가 앤디 워홀의 130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며 "우리나라에서 먼저 백남준 작가의 가치를 이해하고 높이는 데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1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