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XURY / 정성갑 기자
2011.11
미국 현대미술의 역사 짐 다인
(왼쪽) ‘Long Orange Fingers’, 2011, acrylic,
charcoal and sand on canvas. Photo Dan Kvitka
/ Courtesy The Pace Gallery.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에드워드 루샤…. 세계 최고 아티스트와 함께한 시대를 풍미한 짐 다인Jim Dine의 인생은 여전히 전성기다. 팝 아트를 내려놓고 40년 넘게 하트를 그리고 피노키오를 만드는데 세계 곳곳에서 전시 문의가 들어올 만큼 인기가 높다. 욕망에 충실한 삶과 한 주제를 향한 집착에 가까운 몰입! 영원한 현역의 ‘장수’ 비결이다.
1960년, 25세의 짐 다인이 사람들 앞에 섰다. 무대는 좁고 조명은 어두웠다. 입술을 검은색으로 과장해서 칠한 광대 분장의 그는 빨간색 페인트 통을 들어 머리 위에 쏟았다. 종교 집단에서 벌이라도 받는 듯 온몸을 페인트로 뒤집어쓴 청춘은 붓을 들어 흰색 벽면에 이렇게 휘갈겼다. “I love what I do나는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
2년 후 짐 다인은 팝 아트의 시작점이라 평가받는 한 전시회에 참여했다. <일상적 오브제에 대한 새로운 회화New Painting of Common Objects>. 앤디 워홀, 로이리히텐슈타인, 로버트 다우드, 필립 헤퍼톤, 조 구드, 에드워드 러스타, 웨인 티보 등이 뜻을 합쳤다. 무겁고 어렵고 복잡한 미술을 집어던지고 쉽고 재미있고 대중적인 예술을 하자는 것이 이들의 목소리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코카 콜라, 만화, 아이스크림을 ‘일상적 오브제’로 택했는데 짐 다인은 망치 같은 각종 공구, 붓과 팔레트를 집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강태희 교수는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소비사회를 대표하는 물건들을 별다른 감정 없이 선택한 반면 짐 다인은 지극히 개인적인 물건을 골랐다는 것이 다르다”라고 했다.
젊었을 때부터 그는 바깥세상보다 자신의 내면에 관심이 더 많았다. 일련의 파격적 행보를 통해 그는 팝 아트의 선구자 그룹에 이름을 올렸다. 지금도 미국 미술계는 그를 팝 아트 시대를 열어젖힌 주역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본인의 생각은 다르다. 팝 아티스트란 타이틀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작품 역시 현란하고, ‘키치적’이며, 재기발랄한 팝 아트와는 거리가 멀다. ‘가벼운’ 팝 아트와 달리 뭔가 묵직한 것이 작품 안에 힘줄처럼 꿈틀대는 느낌…. 그를 대표하는 하트와 피노키오 작품 모두 아름답고 몽환적이어서 한때 기괴하고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인 이가 만든 작품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특히 1970년대에 그린 하트는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황홀한 분위기와 색감을 드러내는 것이 많다. 그와 함께 새로운 미술 시장을 열었던 이들은 대부분 타계했거나 조용한 일상을 살고 있다. 짐 다인처럼 여전히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세계 곳곳을 넘나들며 전시회를 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 욕심 많은 아티스트는 사진 작업도 하고 시도 쓴다. 지난 10월 초 리안 갤러리 대구점과 서울점에서 동시에 개최하는 개인전을 위해 내한한 그를 만났다. 11월 19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회에 그는 15점의 회화와 조각 작품을 내놓았다.
팝 아트는 1960년대 미국에서 꽃핀 이래 지금까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런 미술 사조의 개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것을 왜 거부하는가? 명백히 잘못 이름 붙은 것이기 때문이다. 팝 아트는 소재와 주제를 ‘바깥’에서 찾는다. 일상의 오브제를 미술로 끌어들이는 것이 핵심이다. 나는 예술의 화두와 주제를 늘 내 안에서 찾았다. 작품을 통해 나를 이야기한 거다. 팝 아티스트로 분류되고 계속해서 선구자 중 한 명으로 남으면 더 많은 그림을 팔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팝 아티스트로 분류된 것이 사실이다. 이를 묵인한 이유가 뭔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류에 휩쓸린 측면이 많다. 내 목소리는 시대적 분위기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리처드 해밀턴이 영국에서 팝 아트를 선보인 직후 미국에서도 팝 아트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웨인 티보라는 작가는 케이크 하나 그려놓고 아트라고 했다. 20세기는 그런 시기였다. 진정한 팝 아티스트는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슈타인 둘뿐, 나머지는 모두 가짜다.
‘해프닝’도 했고,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함께 팝 아트 전시에도 참여했다. 이런 다양한 활동을 통해 당신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딱히 주제나 목적은 없었다. 나를 표현하고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해프닝 아트와 팝 아트는 그만두었지만 나를 드러내는 작업은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 바뀌었을 뿐. 한 작가의 의식은 하나의 고정된 그릇이 아닌 수많은 도구와 방법을 통해 표출된다.
철물점을 운영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영향으로 무언가를 정직하게 만드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다. ‘손맛’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당신의 감성은 가볍고 트렌디한 팝 아트와는 처음부터 궁합이 맞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가 많다. 팝 아트는 한때의 내 생각을 표현하는 유용한 도구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손으로 정직하고 우직하게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다. 내 작품은 두터운 재질감과 추상적 표현 요소가 특징이다. 캔버스에 접착제를 바르고 모래를 뿌린 후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벗겨내는 작업을 반복해 완성한다. 이런 내 작품에 자부심이 있다.
미국에서 처음 팝 아트가 태동하고 전 세계로 그 인기가 퍼져나간 걸 본이로서 요즘 젊은 팝 아트 작품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말도 안되는 우스운 작품이 있는가 하면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도 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때부터 50년 넘게 한눈 팔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 아티스트가 되고 싶었나? 어릴 때부터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난독증이었다. 그때부터 그리기만 했다. 학교에서도 미술 수업을 가장 좋아했다. 그림을 그릴 때면 마음이 편안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이 이거구나 하고 막연하게 느꼈다. 그때부터 그림을 통해 세상과 대화하고 싶었다. 나는 예술에 늘 감사한다. 예술이 없었다면 글 못 읽는 나를 세상이 바보 취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45년 넘게 하트를 그리고 있다. 하트에 집착하는 이유는 뭔가? 하트를 발견한 것은 금맥을 찾은 것에 비유할 수 있을 만큼 의미가 크다. 하트를 그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전한 세상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만약 당신이 정말 귀한 금맥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하겠나? 계속해서 파고들어가지 않을까? 내게 하트는 그런 의미다. 작업 활동을 계속할 수 있게 하는 ‘불꽃’은 누구에게나 필요한데 그 불꽃이 내겐 하트다. 내 손안에 작은 그 불꽃을 담고 꺼지지 않도록 잘 돌보는 일 역시 무척 중요하다.
그간 작업한 하트가 수천 개가 넘는 것으로 안다. 아직도 더 그릴 만한 하트가 남아 있는가? 지금껏 작업한 하트 중 똑같은 작품은 단 하나도 없다. 매번 다른 느낌으로 그리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내 모습도, 생각도 바뀐다. 나오는 작품도 다를 수밖에 없다. 웃는 하트도 있고 눈물을 흘리는 하트도 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트를 그릴 것이다.
오랫동안 한 소재를 깊숙이 파고들다 보니 다양한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얘기도 듣는다. 세상의 변화를 재빠르게 알아채고 따라가는 데 관심이 없다. 나 자신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이 원하는 데만 관심을 두다 보면 힘 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보고 느낀 하트는 좌우가 대칭인 예쁜 하트였다. 찌그러지고 일그러진 모양이 아니다. 망치를 예로 들면 기능에 충실한 투박한 디자인 제품에 익숙하지 기괴하고 현란한 모양에는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그는 펜을 달라고 하더니 빈 종이에 찌그러진 하트와 ‘예쁜’ 하트, 기괴한 모양의 망치와 투박한 디자인의 망치를 그리며 설명했다). 세상이 파격적인 디자인을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이를 수용할 필요는 없다. 나를 진실하게 보여주면 그것이 ‘작품’이 된다.
하트 작품에는 다양한 제목이 붙는다. 푸른 이끼 마노Moss-Green Agate, 벌에 물림Bee-Bite, 샌드 스웨트와 김치Sand Sweat and Kimchi…. 제목을 짓는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 작업할 때의 느낌과 영감을 토대로 시제처럼 툭툭 제목을 붙인다. 작업을 하며 느낀 모든 감정과 경험이 하나의 키워드로 모아지는 거다. ‘샌드 스웨트와 김치’의 김치란 단어는 이번 전시를 위한 작품을 작업하는 동안 한국을 자주 생각했기 때문에 넣었다. 내 하트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람, 자연, 문화…. 보는 이의 생각과 마음에 따라 무한대로 변신한다.
갤러리를 통해 들으니 김치를 좋아한다고 하더라. 우리 식구 모두 김치의 왕 팬이다. 심지어 아들은 김치를 직접 담근다. 농장을 하나 갖고 있는데 그곳에는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채소가 가득하다. 지난 4월 일본 나고야에서 가져와 심은 방울토마토 씨앗은 이곳에 오기 전 첫 열매를 맺었다. 한국에 왔으니 토종 마늘을 구해갈 수 있으면 좋겠다.
1년의 반 이상을 보낸다는 워싱턴 주의 소도시 왈라왈라Walla Walla에서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건가? 세계 여러 도시에 작업실이 있는 걸로 아는데 유독 그곳을 좋아하는 이유가 뭔가? 그곳에 작업실을 마련한지 30년째다. 농부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정원을 둘러보고 채소를 살핀다. 칠면조와 오리도 키운다. 밤에는 저 멀리 숲 속에서 코요테 소리가 들린다. 이런 환경은 작업에도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 계속해서 좋은 에너지와 영감을 얻는 거다. 음악을 들려주고 멜로디를 만들게 한다.
1990년대 말부터는 피노키오에 몰입하고 있다. 짐 다인의 분신이란 평가도 있는데…. 피노키오를 단순히 거짓말하는 아이로만 생각하지 않는다(웃음). 피노키오가 목각 인형에서 사람이 되기 위해 겪어야했던 분투와 도전이 내 모습과 닮아 있어 동질감을 느꼈다. 언젠가부터 피노키오는 내 자화상처럼 친밀하게 느껴진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스스로 제페토 할아버지가 되어 피노키오 안에 담긴 많은 이야기를 나만의 버전으로 만들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지금껏 무려 300여 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치열하게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한 번 작업을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일한다. 페인트, 조각, 사진 등 모든 ‘미디어’를 사용하는데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초창기 작품 제목처럼 ‘The Smiling Workman’이 되는 거다.
‘타이틀’이 아닌 솔직한 내면의 욕망을 좇는 인생을 살았다. 이런 당신이 정의하는 진정 럭셔리한 삶은 어떤 것일까? 끊임없이 배우는 삶. 탐구하는 삶. 그리고 무언가를 오랫동안 사랑하는 삶.
짐 다인은 1935년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태생으로 오하이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뉴욕으로 이주, 다양한 행위 예술과 프로젝트 전시에 참여했다. 앨런 카프로가 창시한 ‘해프닝’에 동참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에는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등과 함께 팝 아트 전시를 조직했다. 하지만 가볍고 유희적인 팝 아트에 곧 한계를 느끼고 1970년대부터는 고된 노동과 수작업이 동원되는 회화와 조각 작업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인 하트 시리즈는 이런 작업적 특징이 가장 잘 묻어나는 작품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재질감과 입체감이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강태희 교수는 그의 하트를 일컬어 “화려하고도 강렬한 오케스트라 같다”고 했다. 작품가는 100호 기준으로 2~3억 원에 형성되어 있다.
기자/에디터 : 정성갑 / 사진 : 안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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