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urtesy of the artist & Leeahn Daeg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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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젊은 그대는 어디에?
80년대 말부터 젊은 패기로 현대미술의 새로운 실험을 해온 젊은 영국작가들('yBa')이 1997년 로얄 아카데미(RA)에서 열린 《센세이션(Sensation)》전을 계기로 세계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도 벌써 오래 전 일이다. 그 당시, RA의 전시책임자인 로젠탈(Norman Rosenthal)은 여론의 압박에 시달렸으며, 4명의 아카데미션이 사직했다. 그럼에도 불구, 로젠탈이 허스트를 비롯한 yBa의 작업에 대해 새롭게 느낀 것은 그들이 가진 리얼리티와 삶에 대한 태도였다. 누가 뭐라 해도, 그들이 미술을 통해 우리 시대에 충실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위 '충격 가치(shock value)'라는 미술의 새로운 소통방식을 부각시킨 그들은 이미 오늘날 미술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중년이지만 90년대에는 신세대를 대표했던 이 작가들이 일으켰던 미적 충격은 과격하고 끔찍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실험성이 참신해 보인다. 그 때, 그들은 못됐지만 멋졌다. yBa의 대표주자이며, 반체제와 반문화를 상징했던 데미언 허스트는 1995년 터너상을 수상하였다.
이제 그는 40대 중반을 바라보는 중견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미술인뿐 아니라 일반인도 널리 알 정도의 유명세를 갖는다. '데미언 허스트'는 바로 고가를 뜻하고, 작품의 가치는 주제보다 돈의 액수로 환산된다. 최근 8천6백 개의 다이아로 두른 해골은 1500억원($100m)에 팔려 가장 비싼 작품으로 기록되었다. 사실, 작품은 세계적 언론을 타고 그 액수보다 더 많은 효과를 보았다.
그래서 허스트를 얘기할 때, 작품보다는 사회적 역량을, 예술가보다는 자산가로 떠올리는 경향이 강하다. 그는 50여명의 전업 조수들을 거느리며 'Other Criteria'라는 예술출판 회사를 움직이고 있다. 4개의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300개의 방을 갖춘 고딕스타일의 성도 갖고 있다. 스스로가 엄청난 컬렉터이기도 한 그를 그저 '작가'라고만 부르기엔 단어의 폭이 너무 좁다고나 할까.
이번에 리안갤러리에서 열리는 허스트 개인전은 국내에서 최초로 그의 다수 작품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쉽지 않았을 그의 개인전 유치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환영의 의사를 표하고 싶다. 전시를 앞두고 이 서문을 쓰면서 오늘날의 시점에서 허스트를 어떻게 보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을 대할 때 가격의 액수부터 보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 본래의 개념을, 자각의 '초심'을 알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유하고 싶다. 왜냐하면 어찌되었건, 그는 현대의 다양한 시각적 개념의 종합자라고 할 수 있고, 작품에서 그 요소들을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을 근본에 깔고 있으며, 동물, 피, 유리케이스를 사용하는 점에서 요셉 보이스를 떠올리게 한다. 영국 내에서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벗겨진 살, 고립된 사각형 구조 등이 허스트의 작업에서 변형돼 있다. 그리고 미술계를 넘어선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 면에서는 제프 쿤스와 안드레아 세라뇨, 그리고 팝의 거장 앤디 워홀을 닮아 있다.
죽은 동물을 담은 포름알데하이드의 유리상자, 스폿 페인팅의 기계적 색점들, 의학 캐비넷의 차갑고 일률적 배열, 제작자의 관여를 배제시킨 스핀 회화의 우연성 등 그의 작품에는 공통점이 있다. 워홀이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라고 말한 것과 유사한 역설이다, 말하자면, 냉혈적으로 무감각하게 나타낼수록 인간적인 감성을 역설적으로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다. 짐짓 냉정하고 때론 잔인하며, 비인간적이도록 솔직하며 대담하다. 그러나 삶의 경험, 특히 죽음과 맞닿는 부분을 당황스러울 정도로 대면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80년대 이후 현대미술은 신체에 대한 폭력성과 자기 분열을 보이는 일종의 '신경증적 리얼리즘(neurotic realism)'을 나타냈다고 말한다. 허스트의 개념 미술은 그러한 증상을 표현한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르가 회화 조각, 설치를 넘나든다 할지라도 오늘날까지 그의 근본적 의도는 일관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의 가격이 천문학적 수준이고 예술의 차원이라기보다 비즈니스에 가깝다고 비난해도, 또 자기 손은 건드리지도 않고 반복적으로 찍어내어 속물처럼 쉬운 이익을 낸다고 지탄을 받더라도 말이다.
이번 전시는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스핀에서(In a Spin), 시각적 캔디(Visual Candy), 약국(Pharmacy), 삼단화(Triptychs), 믿음을 넘어서(Beyond Belief) 등이 그것이다. 스핀 페인팅 5점과 판화 23점, 색점 페인팅 4점과 판화 1점, 의학 캐비넷 2점과 주사기와 알약으로 구성된 오브제 작품 2점 등 4점이 하나의 구성을 이루어 전시된다. 그리고 이번 전시의 핵심인 삼단화(Triptychs)에서는 나비 페인팅을 보인다. 나비 페인팅은 주로 단독으로 보이는 게 보통인데, 이같이 기독교의 전통적 삼단화 구조로 보이는 경우는 드물고 국내에서도 처음 소개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믿음을 넘어서(Beyond Belief)에서는 2007년 제작된 다이아몬드 해골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 선보인다. 즉, 다이아몬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회화 1점과 다이아몬드 해골의 실크스크린 판화 5점 그리고 옵셋 판화 10점이 그것이다. 은으로 제작한 해골 오브제 작품도 함께 볼 수 있다.
전시에서는 본래 작업의 다양한 복제와 연장선상에서 제작된 작품들이 다수 전시되는데, 이 글에서는 첫 작업들의 개념을 몇 가지 더듬어보고자 한다.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라는 제목은 본래 작가의 모친에게서 온 것이다. 그가 자신이 만들려는 계획을 어머니께 말했을 때 그녀가 놀라서 외친 말이다. 이 작품은 중고품 가게에서 발견한 18세기 인간 해골을 플래티늄으로 주물을 뜬 다음, 8천여 개의 다이아몬드로 뒤덮어 놓았다. 요즈음 현대 미술작품 중에서 가장 비싼 작품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전통적으로 인생무상과 삶의 허무를 의미하는 해골의 모티프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허스트는 이것을 현대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로 전환하여, 삶의 종말인 해골을 다이아몬드가 의미하는 영원성과 접목, 역설적으로 작품으로 만들었다. 지나치게 반짝이는 해골은 우리의 덧없는 존재를 반복하며, 죽음을 극복하는 가능성을 야기하는 눈부신 부적과 같이 관객의 눈을 현혹한다.
90년대 초부터 보아온 약국(Pharmacy)은 의학 캐비넷(Medicine Cabinet) 작품을 말하는데, 허스트는 이 캐비넷을 신체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전체가 사람의 외양이라면 약들은 신체의 내부이고, 그 부분들은 몸의 다른 부분들에 관여하는 구조이다. 캐비넷이 신체의 외부와 내부의 관계를 나타낸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허스트는 이 구조를 도시풍경이나 위계체제로 짜여진 문명으로 빗대거나, 중세의 박물관이나 우리를 둘러싼 전시관을 의미한다고 언급하였다. 작품의 구조는 모더니즘의 평면 구조를 닮아 있다. 또 작가 스스로가 말했듯, 미니멀리즘의 신뢰와 자신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의 캐비넷 작품에서는 언제나 무언가를 거리를 두고 유지하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관객과 캐비넷의 약 사이를 유리가 막고 있듯이 말이다. 허스트는 말했다. "나는 진정 유리를 사랑한다. 단단하고 위험하고 투명한 물질이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데도 만질 수 없다는 생각. 견고하나 볼 수 없다는 역설. 유리에서의 그 간극이 나의 작품에 상당히 중요하다." 위에서 언급했듯, 캐비넷이 인체와 비유된다면, 신체의 외부와 내부를 분리시키는 유리의 간극 효과는 현대인의 보편적인 고립감을 지극히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병원처럼 차갑고 무표정하지만 가장 실제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느낌은 허스트 작업을 관통하는 리얼리스트의 면모이다. 그의 어투는 미화시키거나 완곡하지 않게, 사실 그 자체를 그대로 이야기해 버린다. 그래서 충격적이다.
그런 의미의 충격은 그의 나비 페인팅 또한 마찬가지이다. 실제의 나비를 캔버스에 붙여 색채를 입힌 작업으로 91년경부터 전시되었다. 나비 페인팅의 '원조'격인 91년 런던 전시에서는 살아있는 나비를 가져와, 그 생명의 싸이클과 회화와의 관계를 작업의 컨셉으로 삼았다. 전시를 의도적으로 통제 밖에 두어 작업의 개방성을 강조한 전시였다. 이러한 개방성은 예기치 못한 드라마로 나타나기도 했다. 즉, 다수의 나비가 갤러리 환경에 적응하여 알을 깐다든지, 나비에서 나오는 피가 캔버스를 얼룩지게 한다든지, 혹은 다수가 마루에 떨어져 밟히기도 했던 것이다.
보통의 경우, 다수의 죽은 나비는 날개가 펼쳐진 상태에서 밝은 단색조의 캔버스에 부착돼 있다, 곤충의 몸이 지닌 섬세함과 나약함이 끈적거리는 물감에 덥혀 있는데, 생물과 물감, 또 곤충의 죽은 몸과 밝은 색채라는 어울리지 않는 병행이 전율을 일으키게 한다.
그것이 나타내는 부조화와 아이러니는 이번 전시에서 보듯, 기독교 전통의 세 폭 제단화 양식으로 구성되어, 실제 곤충의 죽음과 그 미적 승화에 종교성마저 부여된 느낌이다. 밝고 명랑한 빨강, 노랑, 파랑의 색채는 '색채로 박제된 죽음'을 더욱 찬연하게 한다.
이 '나비 수집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복잡함보다는 오브제의 외양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한다. 물감이 날개 표면을 덮을 때, 우리는 허스트가 그 폭력성을 작품의 주제로 의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비는 갤러리에서 요구되는 명확함과 우아함을 갖추며 완전히 총체적인 구성체로 제시된다. 더 완전히 전시될수록, 더 죽은 것으로 보일수록, 그 나비의 몸이 지닌 아름다움은 돋보인다. 작가가 복잡한 생명체의 순환 중, 가장 매력적인 단계를 그 삶의 핵심으로 포착해 낸 것을 알 수 있다.
'허스트'라는 이름이 가진 상품성과 돈과의 연관성을 제쳐두고, 그의 작품성 자체에만 집중하자면, 이러한 생명체의 삶의 싸이클에 대한 그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작업이 실제 삶에서 오는 생물의 몸(죽은 것이든 산 것이든)을 갤러리 공간으로 가져오면서 파생되는 여러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 경우, 관객과의 관계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애초 허스트의 컨셉은 실험적이고 비상품적인데, 이제 그는 가장 비싼 작가가 되어 있으니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비 페인팅은 그를 그렇게 만든 대표적 예라 생각된다.
그러나 나비 페인팅보다 더 상업적이라 인식되는 것이 스폿(Spot) 페인팅이다. 스폿 페인팅은 허스트의 이름이나 마찬가지이다. 90년대 전반부터 시작한 이 회화 방식은 2005년 집계, 500점의 스폿 회화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숫자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많을 것이다. 스폿은 허스트의 아이콘인 셈이다. 대중은 스폿 페인팅과 그 디자인 상품을 사면서 명품과 같이 그의 이름을 구매하는 것이다. (테이트 모던 상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이 그의 스폿이 들어간 디자인들이다.)
흰 캔버스에 동그란 색점들이 일정하게 줄맞춰 그려져 있다.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캔버스에서 색점들은 같은 크기이고 색채는 규칙 없이 임의적이다. 이러한 그리드(grid) 구조는 어떤 감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무표정하고, 형식적이고, 기계적이다. 이를 반복적으로 제작하는 허스트는 지극히 의도적이고 역시 위에서 언급한 앤디 워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계같이 색칠하려는 사람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보이기를 원했다"라고 허스트는 말했다.
지극히 단순하고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스폿 페인팅이 제시하는 것은 사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우리가 스폿 페인팅을 보는 것은 허스트의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가 그림을 그리는 형식적 방법을 보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는 죽을 때가지 이 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듯 창조된 화가, 완벽한 예술가를 좋아한다.(I like this idea of a created painter, the perfect artist)"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작가를 창조해 낸다니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가는 죽었다'를 생각할 때 허스트는 작가가 작품으로 인해 살아나는 것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위트 있는 뒤틀기가 아닐 수 없다.
요컨대, 허스트에게 충격은 거의 형태적인 요소이다. 대중의 눈을 혹하도록 감각의 수위를 높인다기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만든다는 뜻에서 그러하다. 엄마소와 송아지를 세로로 잘라, 서로 떼어놓은 충격적 작품을 기억한다. 모체와의 분리, 몸 자체의 고립이 흉칙하게 드러났다.
우리가 죽음을 못 견뎌하는 것은 바로 그런 고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던가. 지독히도 솔직하게 직접적으로 대면시키면서, 그는 우리 문화에 만연한 죽음에 대한 병적인 부인을 직시하게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며 허무와 공허로 빠져들지는 않는다. 반대로 그가 만드는 인간 조건에 대한 인식은 차라리 삶을 두렵지 않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91년, 허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삶에서의 끔찍한 것은 아름다운 것을 가능하게 하고, 또 더 아름답게 한다." 우리는 아무래도 젊은 시절의 그를 더 좋아하는지 모른다. 지금처럼 부유하지 않고, 요즘처럼 콧대 높지 않은 좌충우돌 요크셔 청년, 데미언 허스트를-.
현대미술에서 대중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아름다움의 문제이다. 허스트의 작품은 미술작품 자체가 아름다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설득하는 듯 하다. 아름다움으로부터의 자유. 이것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는가. 그는 아름답지 않은 자신의 작품이 나타내는 불편하고 두렵고 밀실공포를 유발하는 느낌이 개인적이라기보다 보편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의 두려워하는 유리, 모두의 두려운 상어, 모두의 나비를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그는 결코 단순치 않다.
비록 지나치게 과격하고 폭력적이며 때로 끔찍하기도 하지만, 허스트가 우리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의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재치 있고, 타협하지 않으며, 더러움과 과격함을 마다하지 않는 비꼬인 상상력으로 이 시대의 양상을 탐구하는 그의 당돌함을 부인할 수 없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부자들이 그의 비싼 작품을 사들이는 동안, 우리는 그저 예기치 못할 그의 상상력이 어디로 튈지 즐기기만 하면 될 일이다,
전영백(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