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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Courtesy of the artist & Leeahn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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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ung-Keun Koh Oct 12 – Oct 27, 2007 | Daegu

평면으로 지은 몽환적 질서의 공간 


카메라는 인간의 눈을 모사한 도구이다. 사진을 찍는 카메라의 광학적 기원은 어두운 방의 한 쪽 벽면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해 반대편 안쪽 벽에 상이 만들어지는 바늘구멍 상자의 원리에서 비롯되었고, 이는 또한 육안의 망막에 상이 맺히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사진이 이차원의 평면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입체적인 공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눈이 망막의 이차원 이미지 정보를 이용해 공간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진을 통해서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 가장 유사한 경험이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사진을 이용한 예술가들은 필연적으로 육안을 통한 일상의 경험과 차별화된 시각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고명근의 사진을 이용한 조각은 입체에서 평면으로 압축된 이미지들을 다시 공간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다. 이것은 단순한 일상 공간의 재현이 아니라 작가가 찾아낸 그만의 방식인데, 평면의 사진 이미지를 활용해서 쌓아 올린 구조물이 실제 공간과는 완전히 다른 입체의 형태를 취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근 이십 년 전 유학시절 시작된 그의 초기작은 나무로 만든 구조물에 사진을 붙이고 그 위에 가소성 물질을 덮는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이때부터 건물은 그의 단골 소재였는데, 뉴욕의 환경 때문이었는지 공상과학소설에 나올 법한 어둡고 낡은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사용한 폴리코트와 같은 표면 재료는 사진 위에 일정 정도의 두께로 덧입혀져서 구조물과 사진을 본래 하나인 것처럼 융합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경우에서 사진은 완성된 조각품으로서 그의 작품이 지니는 물성을 돋보이도록 하는 장치였다. 표면에 부착된 사진이 공간과 평면의 부딪힘을 경험하도록 함으로써 시각적으로 새로운 건물을 만들어 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물의 형태가 본래의 건물의 모양에 준하는 것이었다는 면에서 작품이 실제 건물의 축소판처럼 읽혀지기 쉬운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그가 물과 불, 공기와 흙, 나무 등의 자연을 소재로 한 사진들을 작품에 덧입히기 시작하면서 적극적으로 극복되었다. 부정형의 대상들을 육면체 혹은 변형된 입체에 부착하면서 그의 작품은 구상적 조각에서 시각적 원형 原型. visual primitiv을 다루는 작업으로 이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현실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을 예술 작품에서 볼 때 우리는 순수한 시각적 즐거움을 얻게 된다. 고명근의 작품이 이러한 시각적 유희성을 가지게 된 데에는 입체를 만드는 재료의 변화도 크게 한 몫을 하였다. OHP 필름에 잉크 분사 방식으로 사진 이미지를 프린트한 후 다중 코팅하는 방법으로 만든 평면 재료들을 이어 붙여서 투명한 입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재료의 투명성은 형태의 임의성을 가져왔다. 사진에 찍혀진 대상이 본래 어떠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느냐에 관계없이, 관찰 시점에 따라 변화하는 중첩의 효과를 고려하여 가장 극적인 환영 幻影, illusion을 경험 시킬 수 있는 형태의 입체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사진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사진 자체로 육면체나 원기둥, 방추 등의 구조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구조물은 표면을 지탱하기 위한 덩어리가 아닌 그 자체로 공간을 지각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고명근의 투명한 입체구조물은 고정되어 있지만 관찰자의 움직임을 유도한다. 가까이, 멀리, 그리고 작품의 주위를 돌며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눈의 작용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작품의 지닌 유동적이며 창의적인 공간이다. 

공간을 창조하는 데 있어 작품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작가를 가장 고심시키는 과정이라고 한다. 감상자의 시각 경험을 고려하고 사진 이미지에 담긴 형이나 색과 같은 시각적 구성 요소visual properties들에 따라 입체물의 크기를 정하는데, 실물보다 큰 인체나 인형의 집처럼 제작된 건물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환상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거대한 인체 기둥들 사이를 거닐거나 작은 상자에 담긴 건물 내부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작가가 창조해낸 몽환적 질서를 발견하게 된다. 투명한 이미지의 유동적 공간감이 망막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이 만들어내는 부유하는 듯한 몽환의 인상이라면, 반대로 질서와 안정감은 그가 선택한 사진과 구조물의 형태가 지닌 대칭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눈높이에서 관찰할 때 중첩되는 두면 혹은 네 면이 모두 같은 사진으로 만들어진 건물은 그 자체로 기묘한 대칭적 공간을 구성한다. 

또한 인체를 다룬 작품에서는 복제를 통해 더욱 극적인 대칭 이미지가 보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작가가 추구하는 질서가 무엇인지에 대한 어렴풋한 해답을 안겨준다. 온전히 충실한 시각적 유희의 경험을 통해서 이 세계의 질서로부터 한 발짝 비껴 선 다른 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것, 공상적 허구처럼 멀리가지 않고 현실에 한 발을 딛고서도 만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은 환상이 아니라 꿈속에서 한번쯤은 마주칠 것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것. 이러한 방법으로 고명근은 지속적으로 전도(顚倒)를 반복하는 평면과 공간,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 실재와 환영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고명근의 작품에 내재된 순환적 전도의 속성은 'Stone body' 시리즈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진에 담긴 인체는 본래 돌로 만든 조각품이다. 이상적인 인체의 형상은 현실을 모사한 것이지만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담은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공간에 자리 잡은 인체 형상이 가장 돋보일 수 있는 특정 시점을 골라 사진으로 평면 이미지를 만든다. 그리고 다시 그 평면에 공간을 부여한 입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본래 조각이 가지고 있는 표면의 재질감이나 디테일은 적어지고 선적인 요소들이 강조된다. 선은 우리의 눈이 대상을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므로 단순하고 명쾌하게 인체의 형상을 파악하고 아름다움에 집중하도록 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이 또한 육안이 평면적 망막상retinal image을 통해 입체적 대상을 파악하기 위한 환영적 기제illusory mechanism인 것이다. 그리고 투명한 구조물로 완성되어 중첩된 이미지들은, 마치 사람의 두 눈이 다른 위치에서 대상을 바라봄으로써 입체시가 가능한 것처럼, 기묘한 현실적 공간감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고명근의 'Transparent container' 는 평면으로 지은 공간에 그만의 몽환적 질서를 담아 낸 것이다.

신수진 (사진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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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멸의 운명 속에서

시간의 짝은 공간이다. 공간의 짝은 시간이다. 시간 없는 공간이 없고 공간 없는 시간이 없다. 둘은 항상 함께 존재한다. 시간을 품는 태 胎 라는 점에서 공간은 고정돼 있지 않고 변하는 그 무엇이다. 공간에 구현되는 흐름이라는 점에서 시간은 벗어날 수 없는 형 形 을 가진 그 무엇이다. 둘은 무한할 듯 유한하고 유한할 듯 무한하다. 미술이 공간예술이라 하지만, 공간이 시간과 더불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결국 미술은 시간 예술이기도 하다. 고명근은 공간과 시간의 이 숙명적인 조합에 대해 깊이 사유해온 예술가다. 그는 이미지와 입체를 다루나, 무엇보다 시간의 의미와 자취를 가장 주된 관심사로 다룬다. 

고명근의 작업은 사진을 찍는 데서 시작한다. 그는 이미지를 사냥하는 이미지 사냥꾼이다. 그가 즐겨 포획하는 이미지는 서양의 미술관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전 조각들과 오래되어 낡고 허름한 건물들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하지는 않았지만 숲과 하늘, 바다 등 자연 소재도 적잖이 촬영했다. 고전 조각 소재는 고대 로마 시대와 18~19세기의 서양 대리석 조각이 대부분이다. 건물 소재는 주로 미국과 한국의 변두리 지역에서 포착한 것이다. 건물 소재의 한 지류로 미술관의 실내 등을 촬영한 인테리어 소재도 있지만, 앞의 두 가지에 비해 그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어쨌든 이런 소재들을 이용해 고명근은 크고 작은 공간 속에 스며든 시간과 진중한 대화를 나눈다. 

시간 순으로 보면 서양 대리석 조각을 이용한 작업이 작가의 보다 최근 관심사에 속하나,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먼저 낡은 건물 이미지 작업에 눈길을 주어보자. 건물은 사람의 둥지다. 한마디로 사람을 품는 그릇이다. 연약한 우리의 살과 비교해 건물의 몸체는 강하고 단단하다. 그것들은 벽돌이나 대리석, 철근 등으로 이뤄져 있다. 자연의 온갖 시련으로부터 인간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니만큼 건물은 비장할 정도로 외부세계에 저항적이다. 하지만 그런 건물도 언젠가는 풍화와 시간의 퇴적에 무릎을 꿇고 만다. 외장재가 떨어져나가고 골조가 파인다.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헐벗고 가난한 모습이다. 고명근의 앵글에는 이처럼 시간과의 씨름에 지쳐 쓰러져가는 건물들이 포착된다. 

피라미드나 파르테논 신전처럼 오랜 세월을 버텨온 건축물도 있지만, 결국 모든 건축물은 운명적으로 무너진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운명'이라는 것이다. 생성된 것은 반드시 파멸에 이른다. 그것이 운명이다. 사멸의 의미가 내포되지 않은 운명이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신에게는 운명이 없다. 그는 사멸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 밖에 있다는 의미이며, 사멸을 골간으로 하는 운명은 결국 시간의 자식이다. 세상에는 시간이 존재하므로 우리는 운명을 따를 수밖에 없다. 시간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우리는 운명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의 손길이 자비롭든 잔인하든 시간을 벗어날 수 없는 우리는 시간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모든 처분은 그에게 달렸다. 문제는 시간과 운명의 지배아래 있는 우리가 항용 불멸을 꿈꾼다는 사실이다. 불멸은 시간에 대한 반역이요 도전이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가능성을 끝없이 시험하려 한다. 그 끝은 시간의 해체다. 하지만 아직 그 누구도 시간을 해체한 사람은 없다. 끝없이 해체되어온 것은 인간 자신이다.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의 영광을 드높여온 건축물이 저토록 황량하게 버려지거나 외로이 놓여 있는 데서 사멸을 운명으로 안고 사는 우리의 실존을 보게 된다.

고명근의 작업은 이런 사진들을 찍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입체, 주로 입방체의 형태로 만드는 데로 나아간다. 요즘 그가 만든 입방체는 대부분 육면체 꼴이다. 

건물을 촬영한 필름 앞뒤로 투명 필름을 여러 장 붙여 단단한 면을 만드는데, 원본 필름 이미지를 여러 개 복제해 동일한 이미지의 면을 네 장 만든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전후좌우로 이어 붙여 각각의 면이 똑같은 장면을 연출하게 한다. 붙이는 방법은 필름이 겹치는 부분을 인두로 지지는 방식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을 보면, 비록 필름 위에 건물의 이미지가 또렷이 나타나 있다 하더라도 필름이 가진 투명성으로 인해 뒷면이나 옆면의 이미지가 겹쳐 보인다. 같은 이미지인 까닭에 겹쳐 보임으로써 나타나는 중첩의 효과는, 이 이미지들이 실체는 없고 동시다발적인 환영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렇다. 고명근의 작품은 '실체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실체로 생각하고 우리가 만지고 만들고 사용하는 모든 것을 실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의 힘은 이 모든 실체를 환영으로 만들어버리고 만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모든 것은 끝내 우리 기억에 환영으로 남을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조차도 환영으로 기화할 뿐이다. 영원히 실체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 인류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인류의 화려했던 문명도 종국에는 우주의 아련한 환영으로 남고 말 것이다. 돌 위에 돌조차 남지 않을 상황이 되면 과연 그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해야 할까? 실체란 그저 어느 한 순간의 상황이요 환영일 뿐이다.

고명근의 조각 소재 작품은, 그럼에도 실체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의 본능을 서양 조각이 지닌 고도의 감각주의에 의지해 표현한 작품이다. 고명근이 촬영한 서양의 대리석 조각들은 조각을 만든 조각가의 개별적인 창작 의도보다 사실적으로 대상을 재현하려 애써온 서양미술의 전통 자체를 더 부각시킨다. 그리스에서 발원한 서양의 조각 전통은 현실세계에서 보는 사람과 똑같은 형상을 만드는 것, 곧 자연주의를 매우 중시해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핍진한 이미지는 바로 그 사실로 하나의 환영이 된다. 돌은 돌이지 사람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환영을 향한 열망이 예술작품을 현실에 끝없이 다가가게 만들고 그 기교의 극치를 찬탄하게 한다. 이 환영은 현실을 추수하는 환영이며 현실을 찬양하는 환영이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 환영을 만들 수 있다는 자부심은 우리의 능력을 불멸의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선언을 하게 한다. 우리가 창조한 예술의 불멸성에 기대 우리 자신의 불멸성을 보장받길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순간의 착각일 뿐이다. 우리가 작은 환영을 만들 수 있다 하여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에 빗대 예술이 길 뿐이지 무한한 시간 앞에서 예술 또한 극히 짧은 그 무엇이다. 예술이 길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환상인 것이다. 고명근은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서양 조각의 이미지들 역시 육면체 등 입방체의 틀 안에서 투명하게 비치고 중첩되는 이미지로 보여준다. 전체상보다는 부분상으로 접근하는 게 많은데, 에로티시즘이나 엑스터시 혹은 나르시시즘의 성격이 강조된 부분상이 대부분이다. 에로티시즘이나 엑스터시, 나르시시즘은 육체를 떠나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을 실체로 인식하려는 우리의 욕구를 강하게 반영하는 것들이다.

왜 유럽의 조각가들은 이런 특질을 조각 작품에 그토록 집요하게 투여해왔는가? 환영을 실체로 고정시키려는 연금술사적인 노력을 왜 그리도 강박적으로 표출해왔는가? 그것은 그만큼 시간을 이기고 영생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아닐까. 이 현실을 환영 속으로 사라지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서였지 않았을까. 현실 공간을 똑같이 재현해낼 수 있다면 공간의 지배가 가능할 것이고, 공간의 지배가 가능하다면 그 짝인 시간의 지배도 가능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명근이 클로즈업해 찍은 18세기 조각들의 실제 사람 피부 같은 대리석 표면을 보노라면 그 처절한 노력에 경외심이 일 정도다. 하지만 우리 육체에 비해 훨씬 단단한 그 '스톤 바디'들도 언젠가는 작은 티끌이 되고 말 것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조각가를 부르는 말이 '계속 살아있게끔 하는 자'였다고 한다. 이집트 사람들은, 돌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으면 그 대상이 죽어 육체가 썩어 없어진다 해도 조각상에 죽은 이의 영혼이 깃들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우주의 역사가 이미 137억년이나 됐고 앞으로도 억겁의 세월이 흐를 것이라는 사실을 계산하지 않았다. 돌이 먼지가 되고 먼지가 다시 돌이 되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할 세월을 고려하면 돌로 형상을 새겼다고 그 덕에 계속 살아있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투명한 필름에 반복되고 중첩된 환영으로 나타나는 고명근의 조각 이미지들은 불멸을 향한 인간의 이 모든 노력에 일종의 레퀴엠으로 다가간다. 물론 그렇다고 고명근이 인간의 실존이나 세계를 꼭 허무주의적으로,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넘어설 수 없다고 우리의 존재가 끝내 비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극은, 오히려 넘어설 수 없는 시간을 넘어서려 할 때 발생한다. 
그의 '데칼코마니아' 연작을 보면 이 우주가 얼마나 아름다운 질서 속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진정한 구원은 시간을 넘어서는 데서가 아니라 우주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그의 작품에는 그런 본원적이고 본질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탐색이 들어 있다. '데칼코마니아' 연작에 응용된 데칼코마니 기법은 종이 위에 물감으로 어떤 무늬를 만들고 그 위에 다른 종이를 찍거나 종이를 접어 동일한 무늬 두 개를 대칭적으로 만드는 기법을 말한다. 순수한 데칼코마니처럼 물감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데칼코마니의 대칭성에 기대 이미지를 배열함으로써 고명근은 자연의 핵심적인 질서와 그 질서의 아름다움을 생생히 드러냈다. 

대칭의 아름다움은 우주 공간 구석구석에 스며 있는 아름다움일 뿐 아니라 우리 형상의 본질이고, 나아가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와 미래로 나뉘는 시간의 형태적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대칭은 그 단순한 구성으로 모든 아름다움의 요체라 할 수 있는 '밸런스'의 힘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한다. 이 완벽한 질서의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순간 우리는 비록 우리가 사멸의 운명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이 질서 자체가 영원하고 거룩한 것이며, 우리 또한 이 영원성과 거룩성의 일부분임을 깨닫게 된다. 고명근의 작품에서 보게 되는 우리의 모습은 그렇게 영원한 아름다움에 대해 사유하는 유한자의 모습이다. 유한자는 운명을 탓하지 않는다. 그저 깨닫고 감사할 뿐이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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