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ch-Leucht-Farbe-Grün, 2012, Acrylic, aluminum, color after illumination, tank plate, wood, 197 x 395.6 x 8 cm
- Element M.1, 2017, Acrylic, aluminum, 35 x 155 x 1 cm
- Element S.2, 2018, Acrylic, aluminum, 37 x 142 x 1 cm
- Courtesy of the artist & Leeahn Seoul © Jung-Woo Lee
- Courtesy of the artist & Leeahn Seoul © Jung-Woo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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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갤러리 서울은 지난 두 번의 전시로 관객의 커다란 반향과 호평을 이끌어 낸 독일 추상회화의 거장 이미 크뇌벨의 세 번째 개인전 를 2019년 9월 4일부터 10월 31일까지 개최한다.
크뇌벨의 이번 전시 는 생명력과 생동감이 있는 인물을 암시하는 유기적인 형태의 《Big Girl》과 《Figura》 연작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이질적 형태가 어우러진 구성적 회화까지 2012년에서 2019년 사이에 제작된 최근작을 선별하여 선보인다. 작가는 196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초반 러시아의 구축주의(Constructivism), 추상화의 탄생과 이론 정립에 기여한 카지미르 말레비치(Kasimir Malevich)와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을 비롯하여 자신의 스승이었던 개념미술 작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색면 추상 화가 바넷 뉴먼(Barnet Newman) 등 서양미술사의 주요 거장들의 예술적 이론과 실현 양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수용하면서 자기 고유의 독창적인 조형 세계를 구축했다. 사각형의 캔버스 틀 안에 형상과 배경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회화의 규범을 깨고 기하학적 또는 유기적 형태의 틀로 다변화하면서 회화 영역 바깥의 요소들을 회화적 상황으로 개입시킨다. 또한 크뇌벨의 작품은 회화라는 매체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조각, 설치, 프로젝션 등 다양한 매체의 개념적 특성을 혼용하면서 각 매체 고유의 영역적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1965년 요셉 보이스의 클라스에서 수학할 당시, 크뇌벨은 말레비치의 절대주의(Suprematism) 이론에 크게 심취했다. 말레비치는 〈Black Square〉를 발표하며 검정 사각형은 비대상적 감수성의 표현에 대한 최상의 형태라고 설명했다. 즉 자신의 회화는 ‘순수한 감각의 사막’으로서 흰 바탕은 무의 세계이며 검정 사각형은 실제의 대상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감각, 감수성과 같은 정신적 영역에서 생동하고 역동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요소로서 기능한다고 역설했다. 감상자의 감수성에 대한 표상으로서의 회화 창조에 주목한 크뇌벨은 그러나 회화를 현실에서 분리된 ‘회화적 사실주의’로 표방한 말레비치와 달리, 회화 그 자체의 사물성, 물질성을 인정하며 무의 세계가 아닌 현실 공간을 배경으로 하여 감각 가능하고 감수성을 통해 역동성을 느낄 수 있는 실체적 요소가 되게 한다. 다양한 형태의 흰색, 검정 막대기 골조 구조체와 베이지색 붓질로 덮인 사각형이 나란히 배치된 〈Nach-Leucht-Farbe-Grün〉이나 각기 다른 크기와 형태의 변조를 보여 주는 《Element》 연작은 실제 3차원 공간인 벽을 배경으로 관객의 감각과 감수성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조합, 변화, 전이가 가능한 요소가 된다. 이때 회화 그 자체는 실질적 물체로서의 물질성을 갖는 동시에 감수성 안에서 잠재적 변화를 내재한 비물질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크뇌벨의 《Element》 연작이나 《Bild》 연작은 또한 구축주의나 아상블라주(assemblage)의 특성을 보여 준다. 각기 다른 재료와 크기의 형태를 조합하여 건축적 구조물을 만드는 방식으로 기하학적 직사각형이나 비정형의 유기적 형태의 면을 겹치고 쌓아 올린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실제로는 퍼즐 조각처럼 맞물리게 구성한 이 형태와 색채에서 보이는 상이한 요소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거나 이질성을 드러내며 공존하고 있다. 이와 같이 크뇌벨은 회화이면서 동시에 조각의 조형적 문법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공간 전체와의 관련성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설치작품의 특성 또한 수용하고 있다.
비록 완벽한 기하학적 도형이나 정연한 규칙성의 반복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단순화된 회화의 형태나 반복적 나열 방식은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앨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나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와 같이 회화의 캔버스 틀을 이루는 사각형의 엄격성에서 벗어나 형태의 다변화를 꾀하며 제한된 회화 공간만이 아니라 3차원인 실제 벽 공간으로 침투하는 확장성을 실험한다. 특히 크뇌벨은 ‘종이 자르기’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여 형태의 우연성과 일시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작가의 《Big Girl》과 《Figura》 연작에서 알 수 있듯이 유기적 형태의 생명성과 생동감이 극대화된 형태를 효과적으로 보여 주는 데에 용이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특정 인물을 연상할 수는 없지만 마치 실제로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마주하듯 꿈틀대는 물체의 생명성이 느껴진다. 세상은 우연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요소들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되며 재생, 순환을 거듭하듯이 크뇌벨의 작품 속에는 이러한 세상의 우주적 원리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앞서 말했듯이 정신적 영역이나 형이상학적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는 공간 안에서 감각 가능한 실체적 물질로서의 오브제인 회화로서 나타난다.
색채 탐구 그리고 색과 형의 연관성에 대한 문제는 크뇌벨의 작품 이해에 있어서 주요 논점 중의 하나이다. 초기에 주로 흑백의 회화 작업을 했던 작가는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색채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Anima Mundi》 연작은 그의 이러한 탐구가 가장 집약적이고 발전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수평과 수직이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는 구성 방식이나 명료한 색상의 사용에서 몬드리안의 세계관에 대한 참조가 엿보인다. 또한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미니멀 페인팅과 같이 색면은 그 자체가 하나의 형태이자 공간이다. 즉 색과 형태는 이분법적으로 분리되는 요소가 아니라 등가의 동일 요소로서 기능한다. 크뇌벨의 작품들 또한 이와 같이 색과 형이 하나의 요소로서 일체화되어 나타난다.
그의 스승이었던 개념미술 작가 요셉 보이스의 영향으로 크뇌벨은 회화 창조나 재료의 사용에 있어서 제한을 두지 않는다. 실제로 크뇌벨은 “모든 것이 나에겐 회화이다... 당신이 잠재적인 모든 장소에서 마주하게 되는 존재들이다. 모든 상황에서 회화를 끄집어낼 수 있다”라고 말했다. 1980년대에는 ‘발견된 오브제(objet trouvé)’와 같이 실제 생활 공간에서 우연히 발견한 오브제를 회화의 재료로 사용하거나 섬유판과 같이 전통적 회화 제작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재료들을 활용했다. 특히 90년대부터는 알루미늄을 회화의 지지체로 사용했다. 《Big Girl》과 《Figura》 연작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초록, 분홍, 연두 등 단일 계열의 색조가 밑 칠한 다른 색채와 미묘하게 섞이거나 거칠게 불협화음을 내는 등 과감한 붓질이 그대로 보이도록 그려 나간 작품들은 색을 흡수하지 못하는 알루미늄 재질의 특성으로 인해 물감의 물질성이 날것과 같이 드러나도록 한다. 이는 유기적 형태의 생동감과 시너지 효과를 내며, 비록 그 형태는 추상적일지라도 관객으로 하여금 살아 있는 존재와 교감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청록 색조로 칠해진 〈Figura N〉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바다 심해로 유영하는 것과 같은 몰입감을 느낄 수 있으며, 마이크로코즘으로서의 한 생명체가 가진 영혼의 심연을 목도하는 듯하다. 관객들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단순히 회화의 틀 안에 국한된 세상이 아닌, 관객과 같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감각적 상호작용을 하는 실체적 존재로서의 오브제이자 추상화인 크뇌벨의 풍부하고 색다른 예술 세계를 음미하게 될 것이다.글. 성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