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윤희 기자
입력 2024.11.04. 00:35업데이트 2024.11.04. 09:28
전시실에 들어서면 저 멀리 정면에 사슴 한 마리가 보인다. 멀찍이서 보면 형형한 눈빛이 느껴지지만, 정작 그림에 눈은 그려져 있지 않다. 마치 여러 순간을 한 화면에 담아내듯 사슴의 형태는 고정돼있지 않고, 다양한 각도가 중첩돼 움직임이 느껴진다. 이강소(81) 화백의 1991년 작 ‘무제-91193′. 작가는 “붓을 들고 단번에 그린 그림”이라며 “사슴을 그렸는데 조금 덜 그렸다”고 했다. “완벽하게 그리는 게 아니고 그리다 말아요. 그러면 관객이 볼 때 자신의 경험으로서 그걸 완성할 거 아니에요. 작품은 보는 사람에 따라, 보는 순간에 따라, 어떻게 상상하느냐에 따라 완성되는 것이니까요.”
원로 작가 이강소 개인전 ‘풍래수면시(風來水面時)’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1일 개막했다. 이미지의 인식과 지각에 대한 개념적 실험을 지속해 온 작가의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작품 100여 점을 모았다. ‘바람이 물을 스칠 때’라는 뜻의 전시 제목은 송나라 성리학자 소옹(1011~1077)의 시 ‘청야음(淸夜吟)’에서 따온 것으로, 새로운 세계와 마주치면서 깨달음을 얻은 의식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표현했다.
1970년대 신체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등 실험 미술 운동에 참여했고, 비디오·판화·영상 등 여러 매체 실험을 계속하면서도 이강소는 늘 같은 질문을 던졌다. 작가가 무엇을 만들고 그리든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 전시를 기획한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80년대 초 추상에서 1980년대 후반 구상을 거쳐 1990년대 이후 추상과 구상을 오가는 동안 작가가 그림을 그리는 태도는 한결같았다”며 “매체를 다양하게 쓰면서도 똑같은 질문과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는 지점이 흥미롭다”고 했다.
1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현대미술을 하면서 저는 끊임없이 의심을 했다. 어려서부터 서구의 현대미술이 유행하고 매년 추세가 달라졌는데, 서구인도 아닌 젊은 우리가 저들의 미술 형식을 반복해서 따라가야 하는가, 그게 작가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우리 세대 전반에 있었다”며 “1970년대 실험 미술 운동을 하면서 답을 얻었다”고 했다. “당시 서구 미술은 상당히 근대적인 것이고, 현대성은 우리가 더 괜찮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근대미술은 작가의 의도를 관객에게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강요하지만, 이제 그런 식의 감정이입은 끝내야 하지 않을까요. 관객과 같이 고민하고 공유하는 장을 만들고 싶었어요.”
전시는 그가 매진해 온 ‘작가 지우기’ 과정을 보여준다. 비디오 작품 ‘페인팅 78-1′과 누드 퍼포먼스 작업 ‘페인팅(이벤트 77-2)’은 각각 그리는 행위를 통해 오히려 작가가 지워지거나, 작가의 몸에 묻은 물감을 지워내는 과정에서 회화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박제된 꿩 뒤로 점점이 찍은 꿩의 발자국을 남겨둔 작품 ‘꿩’은 관객에게 이미지를 통해 꿩이 살아있었음을 떠올리게 해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서울관 로비의 ‘서울박스’에는 1973년 서울 명동화랑에서 열렸던 작가의 첫 개인전 ‘소멸’이 재현됐다. 당시 작가는 실제 선술집에서 가져온 낡은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고 관객들에게 막걸리를 팔았다. 이번 전시에선 관객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쉴 수 있는 탁자와 의자를 놓고, ‘낙지볶음, 조개탕, 돼지갈비’ 등 메뉴를 적은 입간판을 세웠다. 전시를 찾은 젊은 관객들이 탁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셀카를 찍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최근 오스트리아계 유명 화랑인 타데우스 로팍과 전속 계약을 맺은 작가는 “한국의 현대 작가로서 남은 시간을 좀 더 튼튼하게 해서,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제대로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전시는 내년 4월 13일까지. 관람료 2000원.